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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소식

[광주학생독립운동 90년①] 독립운동의 불씨, 민주화의 횃불로 완성

[광주학생독립운동 90년①] 독립운동의 불씨, 민주화의 횃불로 완성

[광주학생독립운동 정신, 4·19 넘어 5·18까지 시대정신 실천'큰 역할']

작성자광주속삭임
작성일시2019/11/04 17:35
조회수98

본문1

광주학생독립운동 정신, 4·19 넘어 5·18까지
이름없는 별들 모여 시대정신 실천 ‘큰 역할’


 2019년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90년이 되는 해다.

 그날의 벅찬 감동을 잇기 위해 학생의 날인 11월 3일을 전후해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이제 광주만의

학생운동이 아니라 일제의 압제에 저항한 학생립운동으로 인정받고 우뚝 선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학생들의 외침은 어떻게 진행됐고, 또 이후 대한민국 발전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아울러 지금

이땅의 청년들은 그 정신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 살펴봤다.

 

 금남로를 기점으로 한 광주의 과거 중심지 모습을 살펴보면 지난 100년간 참 많이 변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광주는 1896년 전라남도 도청 소재지로 지정된 뒤 호남의 중심도시로 발전했다. 과거 관찰부라고 불리던

자리에는 전남도청이 들어섰다가 이제는 다시 아시아문화전당이 자리 잡았고, 광주군의 객사, 읍성, 정자

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자들이 잡혀가거나 재판 받고, 옥살이를 하던 당시의 광주경찰서·법원·형무소도,

독립만세를 외쳤던 구불구불 광주천과 작은 장터도 표지판만 서 있을 뿐이다. 학생독립운동 격전지였던 광주역은

이제 동부소방서가 되었고, 1921년에 건립되어 명실상부하게 광주 시민사회운동의 본산이었던 흥학관(興學館)도

리 소문 없이 사라진 뒤 빌딩으로 뒤덮였다.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아직까지 남아있는 공간이라곤 전남여고 역사관 건물(1927년 완공)과 구 전남도청(1925년)·

회의실(1930년) 정도 밖에 없다. 이렇게 유적들이 거의 다 사라져버려 아쉽긴 하지만 ‘광주정신’은 여전히 남아

광주의 긍지를 대변하고 있다.


 광주정신은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뿐만 아니라 광주의 긴 역사 속에서 축적되어 이루어진 결정체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남에서 수많은 의병이 나서서 일본군의 진격로에서 맨몸으로 조총을 막거나 급을

담당하여 이순신은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가 존재하기 어려웠다)라는 글을

남겼다. 조선 말에도 바람 앞 등불에 놓인 국가를 구하고자 호남의병(전체 의병 숫자의 60%)이 맹활약을 했다.


 1919년 3월 10일 광주에서 일어난 3·1운동은 학생과 교사들이 주도하여 청년들의 역할이 컸다.
1929년 11월 3일 시작된 학생독립운동에서 3일 오후의 시위와 12일 2차 시위는 순수한 학생들에 의해 불이 붙었다.

이 운동은 12월 서울에서 연합시위로, 1930년 1월부터 4월까지 간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산되어 320개 학교에서최소한

6만명 이상이 조선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학생독립운동은 젊은 청년학생들의 독립 열망, 비폭력 시위, 세계 피압박

민족과 국가에 희망을 안겨주었다는 의미를 남겼다.

 1960년 3월 15일 낮에 광주에서 일어난 광주3·15의거는 부정투표가 진행 중인 순간에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광주3·15의거는 전국 학생들이 궐기한 4·19로 발전하여 끝내는 자유당 제1공화국의

종언을 고하게 했다.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역시 당시에는 열흘로 끝났지만 광주학생독립운동처럼 1997년 국가기념일로 제정되기까지

17년간 전 국민이 참여하며 민주화운동으로 발전했다.


 400여년 이상 걸친 여섯 가지의 운동들의 공통점은 불법·불의에 대한 저항, 높은 도덕성, 공동체 정신, 민주·평등 사회

지향이라는 네 가지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그래서 이를 ‘광주정신’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또 하나 특징은 청년의 역할이다. 조선시대에는 더 낳은 세상을 원했던 유생과 상민, 그리고 천민에 이르기까지 청년들이

의병으로 나섰고, 식민지 시대에는 새로운 지식으로 무장한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4·19, 5·18 역시 청년 학생들이

주도했다. 하여 오늘날 산업화와 민주화에서 성공한 대한민국을 만들기까지에는 청년학생들의 역할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광주가 독립운동에서 민주화운동까지의 변혁을 주도한 이유는 무엇일까?

 

본문2


‘우리는 피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이 문구가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구 는 광주시 북구 독립로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에 새겨져

있다. 학생탑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탑은 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국민성금으로 1954년 세워졌다. 이 문구는

1929년 당시 독립운동에 나섰던 10대 학생들의 정신이자, 1954년 탑이 건립된 이후 광주의 학생들에게 정신적 방향을

제시한 ‘지침’이었다고 생각한다. 수백 년 간의 정신이 이 문구를 통해 발현해 지난 20세기에는 ‘독립운동’에서 ‘민주화

동’으로, 그리고 21세기 들어서는 본격화 한 ‘통일운동’까지도 광주가 가장 적극 나서게 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세월이 흘러 올해 2019년은 임진왜란 의병활동은 425년, 3·1운동은 100년, 학생독립운동은 90년, 광주3·15의거는

59년, 5·18민중항쟁은 39년이 지난 해이다. 이제는 400여 년 간 점차 발전해 운동을 지역의 정체성으로 간직할 기념

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광주가 여러 가지 긍지를 가지고 있는 도시인만큼 그 책임을 다하는 시민적 노력도 필요

하다고 본다.

 

 호남에서 이러한 운동이 전개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각각의 운동을 이끌었던 인물도 있었지만 운동들이

성공하기까지에는 수많은 ‘이름없는 별들’이 더 주인공이었지 않나 생각한다.
 이 이름없는 별들을 위해 기억-추모-현창하는 일에 우리는 무엇을 보태고 있는 것일까?
 

 광주의 긍지인 광주학생독립운동도 5·18에 이어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시민운동이 필요하다.

근대유적들이 너무 빈약하기 때문에 이 가운데 흥학관, 광주역 등을 복원하는 일에 시민들이 나서는 일도 필요하다.

또 이름없는 별들에 대한 추모 사업을 찾아내는 것도 ‘광주정신’을 현창하는 일이 될 것이다.


                                                                                                          - 김 성 (사)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광주광역시 admin@gwangju.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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