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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소식

[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②] 광주학생운동의 전말

[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②] 광주학생운동의 전말

[나주역에서 발생한 조선여학생 희롱사건이 발단]

작성자광주속삭임
작성일시2019/11/05 10:35
조회수55


  광주학생독립운동 전말

 

             일제 폭압에

       분연히 일어선

          학생들 의거

본문1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발생한 조선여학생 희롱사건이 불씨가 됐다.

 이날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열차 안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지금의 광주제일고) 학생들과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 학생들이 충돌했다. 광주중학 3학년인 후쿠다 슈조 등의 일본인 학생이

광주여고보 3학년인 박기옥 등을 희롱했고 이를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 등과 싸움이

벌어진 것. 싸움은 광주고보와 광주중학 학생들의 패싸움으로 확산되었고, 일본경찰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편들고 조선인 학생들을 구타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광주고보 학생들은 11월 3일 광주에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11월 3일(음력 10월 3일)은 일왕 메이지(明治, 재위 1867~1912)의 생일인 명치절이어서 학생들은

이를 기념하는 행사에 참여해야 했다. 그리고 그 날 광주에서는 전남 누에고치 6백만 석 돌파 축하회가

열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명치절 행사를 마친 광주고보 학생들은 광주 시내에 모여 항의 시위를

벌였고, 일부 학생은 나주 사건에 대해 편파 보도를 했던 광주일보사(당시 발행된 일어신문)로 몰려가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기도 했다. 또 신사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던 광주중학의 일본인 학생들과 집단으로

충돌해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날의 시위에는 광주고보만이 아니라 광주여고보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도 일부 참여했다. 일제는

학생들의 시위가 격렬해지자 광주시내 모든 중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으며, 시위에 참여한 조선인 학생

수십 명을 구금했다.
 

 광주지역 학생들 주도 대규모 시위
 학생들의 시위 소식이 전해지자 신간회에서는 조사단을 파견했고, 청년조직인 조선청년동맹과 학생전위

동맹도 조사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광주 지역의 학생비밀결사인 성진회를 모태로 하여 결성된 독서회 중앙

부의 장재성 등은 광주의 사회단체들과 함께 학생투쟁지도본부를 설치해 학생들의 시위를 전면적인 항일

운동으로 발전시킬 것을 계획했다. 당시 장재성은 광주 지역 학생들의 행동지도를 맡았고, 장석천은 시위의

전국적 확산, 국채진은 전남 지역 학생의 지도, 박오봉은 노동자와 노동단체 지도, 임종근은 전남 지역의

공립보통학교 교사들과의 연락, 강석원은 외부와의 연락, 나승규는 운동자금 조달 등으로 역할을 나누었다.

 

 그리고 11월 7일에는 서울에서 내려 온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권유근·박일, 조선청년동맹의 부건 등과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문제에 대해 협의했다.
 이들은 11월 11일 저녁에 격문을 살포해 11월 12일 광주 시내에서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광주여고보,

광주사범학교 학생들도 참여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당시 학생들은 격문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시위의

자유 보장,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확립,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 민족 문화와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 보장

등 9개 항목을 내세웠다.

 이 날의 시위로 수백 명의 학생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됐으며, 광주 지역 소식이 알려지면서 학생들의

시위운동은 목포와 나주 등 인접 지역으로 퍼져갔고, 12월과 이듬해 1월에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산됐다.

본문2

 
 전국으로의 확산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학생비밀결사인 학생전위동맹 등은 서울 지역 학교들에 조직된 독서회와 청년단체 등을

해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소식을 전하며 서울에서의 시위를 조직했다. 이들은 12월 2일 밤에 전국의 학생과

민중의 총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살포했다.

 이에 호응하여 12월 5일 경성제이고보(지금의 경복고)의 동맹휴교를 시0작으로 경성제일고보(지금의 경기고)·

중동·경신·보성·중앙·휘문·배재·이화·동덕·협성실업 등의 학교에서 동맹휴교가 잇따랐다.

 12월 9일 경신학교·보성고보·중앙고보·휘문고보·협성실업학교 등의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벌인 것을 시작으로

13일까지 시위운동이 계속됐다. 이 기간 동안 12,000여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가했고, 그 가운데 1,400여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그러나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운동은 그치지 않고1930년 3월 초까지 전국으로 확산됐다. 1930년 1월

학교들이 다시 문을 열자 서울에서는 1월 15일 수천 명의 학생들이 일본제국주의 타도와 약소민족해방 만세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고, 일제는 다시 임시휴교조치로 학교를 폐쇄했으나 학생들의 시위는 1월

18일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도 학생들은 가두시위를 조직하거나 동맹휴학으로 이에 호응했다.


 일제의 자료에 따르면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한 학교는 5개월 동안 194개, 참여한 학생은 5만4천여 명에

르는 것으로 보고됐다. 당시 중등학교급 이상의 학교에 재학하던 학생이 모두 8만9천여 명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전체 학생의 60% 정도가 시위운동에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1,600여 명이 구속됐으며,

학교에서는 580여 명이 퇴학, 2,330여 명이 무기정학을 받았다.

 해방 후 정부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난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1953년 10월 20일 제정해 기념했다.

생의 날은 1973년 3월 30일 기념일 간소화 방침으로 폐지 되었으나 1984년 9월 19일 부활됐다. 그리고

2006년 2월 9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주광역시 admin@gwangju.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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