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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나는 이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

[5월 그날 도청서 산화, 류동운 열사]

“나는 이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

작성자광주속삭임
작성일시2020/05/06 10:31
조회수260

 

 

한신대 다니다 광주로… 온 몸으로 느낀 폭압적 권력에 죽음으로 맞서

 

1980년 5월… 광주를 지키다


 광주시민군들이 그때 도청에서 최후의 항전을 하지 않았다면, 두려움과 패배의식에 젖어 죽음의 항쟁대신, 총 든 손 높이 쳐들고 투항의 무릎을 꿇었다면 어찌 됐을까? 40년이 흐른 지금 광주가 광주답게 남아 있을까?


 5·18은 또 우리들 마음속에 기념할 만한 날로 기억되고 있을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또 어디로 어떻게 흘러갔을까?

그랬다. 신학대 다니던 류동운은 오월 그날, 그곳에서 마지막까지 무릎 꿇는 대신 죽음으로 난 길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갓 스무 살 청춘이다. 서른 셋에 십자가에 못박혔던 예수보다도 훨씬 더 어린 나이다. 예수보다 더 잔혹하게 재판도 없이, 죄목도 없이 동트는 새벽녘 광주의 한복판에서 처참하게 계엄군 M16총탄에 스러진다.


 1980년 5월 27일이다. 그의 주검은 사흘 뒤 망월묘지에 가매장돼 알아보기 힘든 상태로 발견된다.

 

목사 아들 류동운, 노래를 잘하던 청년


 박정희 철권 통치로 상징되는 유신시대다. 류동운의 고교시절(광주 진흥고), ‘6·25전적지 산동교’로 보무도 당당하게 행군길에 나선다. 영산강 뚝방길 은사시나무는 봄볕 겨워 잎을 파닥인다. 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를 따라 군대식 행군을 하는 일은 10대 청춘들에게도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다. ‘자유통일’위해서라는데 어쩌겠는가. 교련복 차림으로 한 시간 남짓 걸은 끝에 산동교에 도착한다. 새하얀 백사장이다. 스스로를 ‘무장해제’한 청춘들로 가득하다. 장기자랑 시간이다. 단연 류동운이다. 그를 기억하는 친구들 모두의 가슴속에 여전히 살아있다. 통키타 메고 영산강변에서 라이브로 폴 앵카(PaulAnka)의 ‘크레이지 러브(Crazy Love)’를 부르던 류동운, 노랫말 그대로 모두의 넋을 놓게 만든 ‘미친 열창’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노래 실력을 교회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한다. 아버지가 시무하던 신광교회 고등부는 봄가을 ‘음악의 밤’ ‘에덴의 밤’이라는 이름으로 문화행사를 연다. 특히 ‘음악의 밤’은 당시 교회 행사로는 파격적이다. DJ박스안의 디스크자키가 유행가며 팝송을 틀어주기도 하고, 생음악까지 할 수 있는 자유분방한 무대다. 교회 안다니는 친구들한테도 큰 인기를 끈다. 이곳에서도 류동운은 이름난(?)가수다. 선배와 함께 듀엣을 결성해 ‘크레이지 러브Crazy Love’같은 팝송을 교회에서는 피아노를 치면서 열창한다. 여고생 남고생 할 것 없이 객석은 열광의 도가니다.


 당시 청춘들의 우상이었던 이소룡, 류동운은 그를 닮고 싶었는지 운동에도 열정을 쏟는다. 합기도 3단에 우슈(쿵후)까지 익힌다. 도장안에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한다. 4단 5단하는 사범들과 대련을 해도 이기고는 한다.


 류동운의 아버지 류연창은 목사였다. 그때 당시 50대 초반이다. 광주사회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유명한 목사다. 신광 성결교회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KNCC전남 회장으로 유신 철폐운동에도 앞장선다. 1976년에는 교육지표 사건에 엮여 옥살이까지 한다.


 1977년에는 지역사회의 목사들과 함께 양림교회에서 박정희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결의문을 발표하기도 한다. 감옥을 넘나들며 숨쉬기 조차 힘든 ‘폭압의 시대’를 불끈 일어서서 고발한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이었을까? 류동운을 아는 친구들은 그도 일찌감치 비판적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전한다. 다니던 고등학교 한켠의 구름다리 위에서 쉬는 시간엔 친구들과 시덥잖은 이야기부터 시국문제까지 격론을 벌이고는 한다. 아버지의 구속과 함께 당한 가택수색, 유신독재정권을 비판하는 시(詩)가 적힌 노트가 발견돼 경찰에 끌려간다. 어쩔 수 없는 부정(父情), 당신은 감옥에 드나들면서도 어린 아들이 거기 앉아 있는 것은 가슴아팠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단식투쟁덕에 3일만에 풀려난다. 고1 때였다.

한신대생 류동운, 시민군이 되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류동운은 서울로 간다. 기독교장로회의 한국신학대 신학과에 진학한다. 2학년이던 80년 5월의 봄, 청춘의 심장은 미치도록 뜨겁다. 하지만 찬란한 봄을 즐기는 것은 사치다. 서울시내뿐만 아니라 전국이 하루도 빠질 날 없이 최루탄 가스로 자욱하다. 전두환 신군부는 각 대학에 휴교령을 내린다. 기숙사마저 닫혀버리자 광주로 내려온다.


 5월 18일 전남대생들과 함께 시위를 벌이다 상무대로 연행된다. 여기저기 성한데 없이 사흘만에 풀려난다. 31사단장이던 정웅 장군의 덕이다. 아버지가 한때 시무했던 충북 증평교회의 교인이었던 인연이다.


 상무대에서 풀려나자마자 다음날 금남로로 달려간다. 이번엔 동생(류동인)도 함께 따라 나선다. 계엄군과 대치중인 시민 시위대의 앞쪽에 선다. 헬기의 프로펠러소리, 수레에 실린 시신들, 시민들의 함성, 전쟁터가 따로 없다. 그때만해도 동생과 함께 상무관으로, 전남대로 구경 아닌 구경을 다닌다. 그날은 도청 앞에서 총성이 울린 날이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만행이 그를 비켜갈 리 없다. 머리며 몸 여기저기 상한다. 닷새 동안 전전긍긍 집에 누워만 있다 몸이 대충 추스려지자 5월 25일 다시 금남로로 간다. 그때 그는 뜻밖의 죽음을 목격한다. 교회 행사 때마다 ‘크레이지 러브’를 듀엣으로 부르곤 하던 친한 선배의 형이다. 당시 충장로에서 오솔길 학사주점을 경영하던 분이다. 거리의 분노한 시위대 중 한사람이었던 류동운이 시민군으로 도청에 들어서게 된 큰 이유일 것이다. 도청안에서 시신수습과 행방불명자 접수받는 일들을 처리한다. 온 몸으로 보고 느낀 폭압적인 권력, 류동운은 어깨에 지워진 십자가의 무게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느낀다.


 총을 든 아들, 그런 상황에서 혼비백산하지 않을 부모 있을까. 아버지는 한걸음에 도청으로 달려 온다. “동운아, 집으로 가자” 아버지는 설득 끝에 동운의 손을 붙잡고 도청을 나선다. 무슨 생각으로 아버지를 따라 나섰을까. 집에 돌아온 그는 지친 몸과 마음을 씻어낸다.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어머니와 형제들, 친구들과 인사를 나눈다. 일기장엔 ‘나는 이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라고 끄적인다. ‘한 줌의재가 된다면 어느 이름 모를 강가에 조용히 뿌려다오!’라는 유언을 동생 동인에게 남기고 집을 나선다.


 놀란 아버지가 아들을 가로막고 나선다.

“아버지, 저를 붙잡지 마세요. 사람들이 무자비한 계엄군에게 희생당하고 있는데 왜 당신 아들만 지키려 하십니까. 아버지는 왜 평소 소신을 버리십니까. ‘역사가 병들었을 때, 누군가 역사를 위해 십자가를 져야만 이 역사가 큰 생명으로 부활한다!’고 하셨잖습니까! 아버지, 저를 붙잡지 마세요!”


 아버지는 할 말을 잃는다. 끝내 아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막아서지 못한다. 교회 청년회원의 주검에 분노해 “역사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바로 며칠전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지 않았던가. “예수를 십자가에 메단 로마 군인보다 더 잔혹한 전두환 신군부의 살육을 막기 위해선 누군가 역사의 십자가를 져야한다”고 외쳤다. 하지만 그 십자가를 진 자가 나의 아들이라니….


아! 어머니!… 아들의 손을 놓다


 5월 26일, 계엄군의 재진입 소식에 시내가 무겁게 가라 앉는다. 여기저기 온통 걱정과 두려움에 수런수런하다. “아버지여 가능하시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십시오”라며 예수조차도 죽음 앞에서 한없이 약해졌다는데 도청안 시민군들의 마지막 밤은 말해 무얼하랴.


 도청앞 분수대 군중들 사이를 가로질러 한 어머니가 나타난다. 굳게 닫힌 육중한 철문을 사이에 두고 도청 안쪽 시민군과 초조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 아들이 여기 있는 것을 알고 왔어요. 보고 싶어서 왔으니 한 번만 만나게 해주세요!”

류동운의 어머니다. 마지막 밤이 될 것 같은 어머니만의 느낌이다. 어머니의 심장이 벌렁거린다. “어머니의 호소대로 아들을 데려가시면 다른 시민군들은 어찌….”


 정문을 통제하던 시민군의 “안됩니다”라는 대답에 눈앞이 아득해진다.


 “그래요, 내 아들만 여기 있는 것도 아닌데…”

 어머니는 주저주저 발길을 돌린다. 두 번 다시 아들을 못 볼 것 같은 두려움에 몸서리 친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발걸음 내딛기도 힘들다. 아들 녀석이 있을 그곳이 자꾸 되돌아 봐진다. 몇 발치나 돌아섰을까.


 “어머니~, 아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아까 그 시민군의 목소리다.


 “류동운이요, 류·동·운!”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 석 자 남기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부활하는 류동운 … 대한민국의 빛되다


 죽음으로써 증거한 기도에도 아무런 응답없는 하나님, 세상은 한동안 하나님도 죽어버렸다고 원망한다. 새들도 모두 다 떠나버렸다고 슬퍼한다. 지옥같은 절망의 시대다. 80년 그해가 가기전 10월, 류동운은 예수처럼 부활한다. 한신대생들은 류동운 추도식을 마친 후에 계엄령 철폐를 외치다 146명이 연행된다. 1987년 후배들은 류동운 열사 추모비를 교정에 세운다. 예수의 십자가처럼 추모비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집권 신군부세력은 추모비를 틈만 나면 들어내려 겁박한다.


 ‘부활한 예수’는 류동운 혼자만이 아니다. 광주의 수많은 영령들도 부활한다. 대한민국이 80년대 내내 최루가스로 뒤덮힌다. 대한민국이 ‘광주의 희생’을 기억하자고 외친다. 그 희생의 정점에 있는 이가 류동운 열사다.


 5월 27일 새벽 도청안에서 끝까지 항거하다 숨진 시민군은 윤상원 열사 등 열 여섯명이다. 그중 한 명이 류동운이다. 그가 살아 남은 자들에게 남긴 ‘마음의 빚’은 지금 대한민국을 있게 한 ‘빛’이 된게 아닐까.


 “이것은 미친 사랑, 이 미친듯한 사랑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해주오. Crazy Love Crazy Love~~”


 통키타를 들고 자지러지며 고음으로 ‘크레이지 러브’ 를 열창해 10대 청춘들의 마음을 뒤흔들던 류동운, 그가 그렇게 미치도록 사랑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글 | 박지수 전 광주시보 편집실장
사진 제공_류동인 류동운 동생

 


광주광역시 admin@gwangju.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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