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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광복촌 을 아시나요?

[독립유공자들의 마을, 남구 광복촌을 가다]

광복촌 을 아시나요?

작성자광주속삭임
작성일시2021/08/18 10:49
조회수54

 

 

최봉호 선생 등 독립유공자와 후손 위해 1979년 조성한 마을
당시 지은 집 모두 뜯겼지만 마을엔 흔적 곳곳 … 최근 유래비도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이날이 사십년 뜨거운 피 엉킨 자취니/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올해 대체휴일이 처음 적용되는 8월 15일은 광복절(光復節)이다.


 76년 전, 1945년 일제강점으로부터 풀려나 새 땅 새 하늘 새 빛을 되돌려 받은 날이다. 모진 압박과 설움의 역사를 딛고 나라를 되찾으려고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던 이들의 수고가 이 땅에 다시 환한 빛을 되비추게 한 날, 그날을 기념하여 정인보가 쓰고 윤창하가 곡을 붙인 노래다. 행진곡 분위기가 나는 힘찬 노래가 자꾸 입안에 맴돈다. 피 흘려 다시 찾은 나라의 무궁한 안녕을 기원한 노래는, ‘길이길이 지키세’를
두 번 강조하였다. 노래는 나라를 되찾은 기쁨으로 부푼 희망에 가득 차 있다.


참 좋은 푸른길에서 만난 광복촌 유래비


 폐선부지에서 광주의 중요한 녹지축이 된 푸른길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 도심을 길게 이어주는 친근한 공원은 답답함을 일시에 해소해준다.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에서 나오는 초록의 기운이 허파꽈리 가득 신선한 숨을 불어넣는다. 남광주와 백운광장을 지나서 광복촌 마을에 이르면 제법 너른 데가 나오는 데바로 ‘푸른길 광장’. 주민들은 ‘광복천 광장’이라 부르는 곳이다. 광복천 광장은 빅마트 쪽 복개도로로 덮힌 곳이 예전에는 금당산에서 흘러내린 광복천이라 그렇게 불러왔단다.


 그곳에서 김준태 시인이 쓴 ‘푸른길을 노래함’이라는 시를 만났다. “나무들이 서로 모여 살고, 새들이 그 나무들 속에 집을 짓고, 아이들이 나비처럼 내려앉은 옛 기찻길은 할머니가 아장아장 손자 녀석 등에 업는 길이고, 할아버지가 손자 딸 앞세워 소년인 양 걷는 길이고, 지어미와 지아비가 늙을 줄 모르고 걷는 길, 젊은이들이 휘파람불며 자전거로 달리는 길!”이라며 시인은 광주가 ‘참 좋다’고 노래한다.

 

 그곳 푸른길 광장에 최근 또 하나 시민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표지석이 세워졌다. 광복촌 유래비다. 올해 3월 남구청은 이곳에 광복촌 유래비 및 공적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했다. 대한민국 광복에 이바지한 독립유공자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광복촌’은 이곳뿐만 아니라 1972년 조성한 서울 수색지구와 진관외동, 경기도 광명시 철산 1동에 지은 광복아파트 단지도 광복촌으로 불리고 있다.


남구에서 광복촌 조사 보고서 펴내


 푸른길 따라 금당산 옥녀봉 자락 주월동과 진월동에 걸쳐있는 독립유공자의 마을 광복촌은, 1976년 조성되었다. 유신정권이 집권하던 당시, 정부가 주월동 소재의 과수원 부지를 매입하여 무주택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을 위해 조성한 마을이다. 조성 당시 이곳은 대부분 논과 밭이었다 한다. 새로운 마을을 만들기 위해서 넓은 부지가 필요했는데, 복숭아밭이었던 이곳이 맞춤했을 터였다. 임시정부와 광복군과 연합군 간의 통신 연락 활동을 펼쳤던 최봉진, 광주학생 독립운동의 주역이었던 윤창하와 송동식, 조길룡도 이곳에서 살았다. 한말 의병장으로 남평, 영암, 보성에서 활동했던 심남일, 독립을 실현하는 정신을 살려 다혁당을 조직한 이홍빈, 3·1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김동훈 등이 이곳에서 함
께 살았다.


‘광복’이 중심, 광복마트, 광복카센터, 광복철물점


 금당산 옥녀봉 아래 광복촌. 1개의 설계도로 12채를 6채씩 앞뒤로 조로록 붙여지었는데, 대지 50평에 건평이 24평이다. 광복회 회원 열한 명이 분양을 받았다. 1채는 상이용사가 들어와 살았다.

 집을 짓는 비용은 당시 200만 원 가량 들었다. 정부에서 50만원, 융자 100만원, 자부담 50만원이 들었다 한다. 주택의 모양은 이태리 풍이었다. 지붕의 두경사면 아래 박공 부분이 집의 정면이 되도록 지은 집이다. 당시 이태리식 집은 한옥보다 비싼 고급주택이었다.
그 때문에 생활이 어려웠던 몇몇 유공자들은 주택을 배정받고서도 융자와 자부담이 부담스러워 세를 내주거나 팔았다고 한다. 욕실이 실내에 딸린 집은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어 장독대에 올라가면 옆집마당이 훤히 보였다. 서로 허물없이 인사를 나누는 정다운 이웃들이 어려운 살
림을 살아냈다.


 마을에 붙어 있던 철길을 지나는 기차소리도 더불어 마을의 풍경이었던 가난한 시절이었다. 12채로 시작한 동네는 도로명 주소로 광복마을길이 7길까지 생길 정도로 확장되었다. 그런데 아뿔싸 처음 출발했던 12채가 있던 곳이 광복마을길이 아니고 서문대로가 되어 버렸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곳에는 독립유공자들의 후손과 함께 마을을 이뤄 살아온 흔적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가게 이름도 광복마트, 광복카센터, 광복철물점 등 광복이 붙어있다. 광복마트 주인어르신은 가게가 있는 사거리가 ‘광복촌 중심’이라고 누누이 말씀 하신다. 현재 광복촌 자리에는 1984년 돌아가신 고 윤창하 선생의 주택이 그나마 유일하게 원형보존 되어 있었는데, 며칠 전 뜯겨나가고 새로 집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3·1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4·19, 5·18을 관통하고 있는 의로운 도시 광주. 이곳 빛고을 광복촌에서 나중에 발등을 찍고 후회하지 않게, 더 늦지 않게 그들의 의로운 발자취를 기억하는 일들이 새롭게 생겨나기를 희망해본다.

 

글·사진 김경일 시인 


광주광역시 admin@gwangju.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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