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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고을한바꾸

거닐고 싶은 그곳 ‘양림’

[빛고을 한바꾸]

거닐고 싶은 그곳 ‘양림’

작성자광주속삭임
작성일시2020/12/09 16:44
조회수944

 

 

 지친 나를 추스르고자 할 때 우리는 길을 떠나고 싶다. 올레길, 둘레길, 순례길, 마실길 등 한 바퀴 걷기가 코로나 정국 속에서도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다. 산뜻한 자연이 있어서 위안이 되고, 그래서 ‘걷기 열풍’은 여전하다. 그러나 ‘단순히 걷기’보다는 ‘의미를 담은 걷기여행’이라면 어떨까.


 의미를 담은 걷기 여행으로 딱 좋은 곳은 단연 ‘광주 양림동’이다. ‘굿모닝! 양림축제’가 열리는 광주 양림동을 거니는 것은 아마도 ‘보이지 않는 의미 있는 시간의 순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양림동은 과거와 현재가 맞물린 곳이자, 전라도에 근대문화를 꽃피게 한 텃밭 같은 곳이다. 광주정신의 상징인 헌신(獻身)이야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양림동에서 만날 수 있는 큰 축은 한국 기독교 역사와 광주정신, 그리고 우리 전통문화, 예술, 그리고 광주사람들이다. 다른 어느 도시 여행지에 견주어도 돋보이는 ‘헌신’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곳이 양림동이다. 양림동을 ‘기독교 남도답사 1번지’라 칭한 이유이다. 특히 연말까지 ‘굿모닝! 양림축제’도 이어진다. 코로나19 상황이 계속돼 온전한 축제가 아니어서 축제 회차도 ‘9.5회’로 정했다. 과거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소규모로 때론 온라인으로 축제가 이어져 의미를 더하고 있다.

‘한센인’과 ‘폐결핵 환자들’ 껴안은 양림동


 양림동은 광주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 선교사들이 발을 내디딘 곳이다. 한국 근대기독교 역사가 양림동 건물 곳곳에 남아 있다. 광주의 근대화에 지금으로부터 110년전 광주에 온 선교사들의 역할이 컸다. 선교사들은 기독교의 뿌리를 내리도록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도 교육, 의료 봉사를 통해 근대화에 이바지했다.


 위대한 것은 천형(天刑)으로 알려져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한센인’들을 광주의 선교사들이 온몸으로 껴안았다. 당시 제중병원은 헌신광주(獻身光州) 근대 의료의 시작점으로 한센인 치료를 처음으로 시작한다. 1909년 4월 4일, 오웬 선교사가 급성폐렴으로 사경을 헤맨다는 다급한 전보가 목포 선교부에 들어왔다. 의사인 포사이드 선교사는 급히 행장을 꾸려 조랑말에 올랐다. 목포를 떠나 나주 남평 쯤에 도달했을 때 길가에 걸인 한 명이 쓰러져 있었다. 산발한 머리에 몸에서 역한 냄새가 풍겼다. 손과 발은 짓물러 형태를 알 수 없었다. 그마저 한쪽 발에만 해진 짚신을 신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걸인은 신음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한센병 환자였다.


 한센병은 하늘이 내린 형벌이라 하여 친자식도 집에서 내쳐질 때였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지나치지 않고 환자를 부축해 자신의 조랑말에 태웠다. 포사이드가 광주에 도착했을 땐 이미 오웬은 운명한 뒤였다. 이국에서 맞이한 동료 선교사의 죽음에 한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오웬의 부인은 슬픔을 억누르고 남편의 침대를 내주며 한센병 환자를 눕히도록 했다. 기력을 차리자 진료소로 옮겼다. 난리가 났다. “문둥병 환자를 병원에 데리고 왔다”며 다른 환자들이 거칠게 항의했다.


 다른 곳으로 환자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 환자를 눕힌 작은 공간은 진료소 근처 오래된 벽돌가마터였다. 가마를 입원실로 지정한 1909년 4월 7일은 사실상 광주나(癩)병원이 생긴 날이다. 선교사들은 한센병 환자들 치료에 정성을 다했다. 포사이드 선교사와 빈민과 한센병 환자에 평생 헌신한 서서평 선교사 등이 주인공이다.

 


헌신의 아이콘, 오방 최흥종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광주 인물이 ‘오방 최흥종’이다. 오방의 생애를 따라가 보면 그 활동 영역과 크기가 엄청 났음을 알게 된다. 오방 최흥종은 광주 최초의 목사로 실천적 목회자의 삶을 살았고, 일제 하에서는 독립운동을 했으며, 사회구원을 온몸으로 외치고 실천했던 인물이다. 좌우 통합을 주도하기도 했다. 게다가 철저히 자기를 버리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몸을 한없이 낮춘 영원한 자유인이었다. 한센인과 폐결핵 환자들을 위해 자신을 바쳤다. 한국 최초의 한센병원인 광주나병원은 그로부터 시작된 역사다. 그는 자신의 봉선동 땅 1천 평을 기증해 한센인 병원을 짓도록 도왔다. 1912년 광주나병원을 지었고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자 나중엔 여수에 애양원까지 개척했다. 이 땅에서 외면해 온 한센병 치료와 결핵퇴치 사업에 그가 크게 이바지한 것이다.


 헌신의 아이콘이었던 오방은 현실정치와는 선을 긋고, 화광동진(和光同塵 ; 리더가 어려운 이웃을 돌보기 위해 본색을 감추고 이들 세계에 섞여 돌봄)의 삶을 실천했다. 한센인과 폐결핵 환자들뿐만 아니라 거지와 고아들의 아버지였다. 나병환자를 위한 구라사업(救癩事業)을 주도했고, 신간회 전남지회장, 계유구락부 회장을 역임했다. 광주 최초 한국인 목사라는 타이틀에 큰 교회 목사였던 그는 이 직함마저도 버리고 무등산 신림교회로 숨어들어 ‘작은 교회 운동’, ‘평신도 운동’을 주도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사망통지서, 유언장과 고별송가를 써 죽음을 대비했다.


 교역자의 반성과 평신도의 각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미국교회에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신사참배를 결의한 조선의 교계에 통렬한 반성을 요구하기도 했다. 과도기의 현상, 심(心)의 종교, 경양방죽매립반대투쟁위원회 건의문을 쓰기도 했다. 농업학교를 세워 계몽운동에 나서고, 유치원을 운영해 교육사업에 나서기도 했다.


 선교사와 오방 최흥종, 이들의 역사를 찾아가는 ‘기독교 남도답사 1번지’ 양림동을 거니는 일은 아마도 ‘보이지 않는 의미 있는 시간의 순례’가 될 것이다. 기독교 유적지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선교사 묘역을 비롯해 우일선 선교사 사택, 오웬기념각, 양림교회, 어비슨기념관, 수피아여중고, 광주기독병원, 최흥종 기념관 등이 자리잡고 있다.


 우일선 사택 주변엔 아름드리 피칸나무와 흑호두나무가 있다. 양림동에 정착한 선교사들이 일부러 심은 나무다. 선교사들은 고향에서 가져온 은단풍나무, 북미산 흑호두나무, 피칸나무, 포플러, 플라타너스 등 수목을 심었다. 아마 이들 고향나무를 통해서나마 향수를 달래고 싶었을 게다. 피칸나무 열매는 영양이 부족한 우리나라 양민들에게 주요 영양식품 공급원이 되었다. 또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전한 셈이다.


 또 양림동 골목길 곳곳에서 예술가들이 살았다. 중국혁명 음악의 대부 정율성 선생, ‘고독의 시인’ 다형(茶兄) 김현승, 이수복, 문병란, 곽재구, 서정주가 여기에서 살았다. TV 드라마 작가 조소혜, 소설가 황석영과 문순태, 박화성도 있다. 불우한 시대를 살다 간 영화감독 정준채, 그리고 임권택도 학창 시절을 양림동에서 보냈다. 화가 배동신, 황영성, 우제길, 이강하, 한희원은 물론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 작가, 음악가 정추, 정근, 피아니스트 한동일 등 양림동을 거쳐 간 예술인 수는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된다. 이 작은 마을은 3·1운동부터 6·25전쟁, 5·18민주화항쟁까지, 숫자만 표시해도 알 수 있는 우리네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두루 겪었다. 그래서 양림동은 100여 년 전 시간이 멈춘 곳, 근대의 시간이 오롯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3·1운동 만세운동 현장과 5·18광주민주화항쟁 당시의 긴박한 현장을, 그리고 1백여 년 전에 이곳에 와 정착한 파란 눈의 선교사를 만날 수 있다. 그들과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펭귄마을 공예촌과 이이남작가 전시실 등 최근 시설들도 찾아볼만 하다.


 답답한 코로나 시대, ‘헌신’ 이야기를 찾아 지금 당장 ‘기독교 남도답사 1번지 양림동’으로 떠나보자.

양성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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