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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고을한바꾸

국현옥 궁중팥죽

[이야기가 있는 광주 맛집]

국현옥 궁중팥죽

작성자광주속삭임
작성일시2020/12/15 13:59
조회수196

 

팥, 검은콩, 단호박 등 모든 재료 국내산만 고집
운암동에서 22년째 … 생김치, 갓물김치 반찬도 일품

 

 꼬부라진 어깨를 메고 퇴근한 월요일. 텅 빈 눈으로 텔레비전 화면만 맥없이 보고 앉았다. 영혼 없이 리모컨을 돌리다 문득, ‘KBS 가요 무대’ 오프닝 타이틀이 흘러나온다.


 ‘그리웠던 그 목소리, 보고팠던 그 얼굴들, 오늘 여기 다시 모였네, 반가움의 꽃 피었네.’ 수 십 년째 어김없는 노래에 익숙한 그 목소리가 생생하게 얹힌다. “가요 무대하긋다! 케비씨 틀어봐야.” 가요 무대는 할머니의 최애 프로그램이었다.

 할머니는 전라도 해남하고도 한참 더 깊은 산골에 살았다. 하루 세 번, 덜렁이는 시골 버스만 ‘점방’ 하나 없는 마을과 세상을 오갔다. 그마저도 눈 날리는 겨울날에는 예사로 끊겼다. 그날따라 창호지 사이로 황소바람이 매정하게 울어댔다. 적적한 산골의 밤, 가요 무대는 어쩌면 할머니의 유일한 동무였다.

 할머니는 하루의 고된 노동이 짓누르는 눈꺼풀과 싸우며 꾸벅 꾸벅 가요 무대를 기다렸다. 혹시 잠이라도 들까, 할머니는 내게 막중한 보초 임무를 맡겼다. “가요무대 하믄 꼭 깨워야 쓴다잉. 퐅죽도 갖다 묵음서 자지말고잉.” 아랫목으로 쪼르륵 달려가 꺼낸 ‘퐅죽’은 여태껏 따뜻했다. 까만 새알심을 오물거리다 보면 설탕 한 톨 없이도 신기하게 달콤한 맛에 신이 났다.


 팥죽 덕분에 가요 무대를 ‘본방 사수’ 한 할머니는 웃었다가 울었다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다들 그냥 저냥 삽니다. 뻔한 인생 별 수 없어요. 그래도 한 구석 가슴 저리는 추억으로 견딥니다.’ 김세레나 씨가, 봉선화 연정이, 그리운 해외 동포도 할머니와 함께 울고 웃었다. 이렇든 저렇든 괜찮았던 그 겨울의 팥죽이 오랫동안 좋았다.


 흘러간 많은 시간이 그리워지는 12월. 아랫목이 간절한 계절에 들어서니 습관처럼 팥죽 생각이 절실하다. 이끌리듯 ‘국현옥 궁중팥죽’문을 열면서도 사실 그 겨울날 팥죽을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다. 팥 맛만으로 달콤하고 구수하며 쫀득한 ‘찐퐅죽’ 말이다.

 국현옥 궁중팥죽에 선 일단 동지죽을 먹어야 한다. 알알이 손으로 빚은 찹쌀 새알심에서부터 다르다. 소금으로 살짝 간을 더하는 건 괜찮지만 설탕을 넣으면 후회할지 모른다. 고소한 팥 맛을 온전히 느끼는 호사는 어디서 쉽게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우리밀로 만든 칼국수 면발의 팥죽도 좋은 선택이다. 먼저 나오는 찰밥으로 속을 달래주면 밀가루 속쓰림 걱정도 덜하다. 아무래도 달달한 음식을 즐긴다면 호박죽이 적당하다. 끈적이지 않는 자연스런 단맛을 즐길 수 있다. 바지락 칼국수와 비빔국수도 사계절 사랑받는 메뉴이다. 여름에는 단연 콩물국수가 인기인데 그럴만하지 싶다. 콩 비린내 하나 없이 진한 콩물은 고소하단 표현으론 한참 부족하다.


 특히 기본 반찬인 생김치와 갓물김치는 그야말로 일품이다. 잡젓으로 깊은 맛을 내는 생김치는 샐러드처럼 싱그럽고 아삭하며 매콤한 게 입맛을 한껏 돋운다. 재래갓으로 담근 갓물김치는 손님들이 자꾸 만드는 방법을 물어보는 통에 아예 레시피를 가게 한 쪽 벽에 붙여 둘 정
도이다.


 운암동에서 22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국현옥 궁중팥죽. 그 흔한 인터넷 광고, SNS 홍보 등과는 거리가 먼 ‘동네 식당’이지만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알려진 광주 맛집이다. 맛의 비법을 물으니 어쩌면 간단한 답이 돌아온다. “특별한 비법이랄 게 없어요. 그저 재료는 국내산
만 쓰고, 그날 그날 아침에 새로 만든 음식을 내놓을 뿐이죠.”

 국현옥 궁중팥죽은 팥, 콩, 검은콩은 물론이고 고춧가루, 쌀, 밀 등 모든 재료를 남평, 화순, 장성 등에서 공수한 국내산만 고집한다. 국내산 팥은 중국산에 비해 3배 정도 비싸다. 그마저도 팥 농사를 하는 농가가 줄어들어 웃돈을 얹어도 구하기 힘들 때도 많다. 국현옥 씨는 농가와 계약재배도 하고 곳곳을 직접 돌며 좋은 팥을 구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하루 8kg, 한 말 가량의 팥을 매일 삶고 단호박을 갈아서 음식을 만든다. 생김치도 항상 새로 버무린다. 동네할머니들의 손을 빌려 빚은 수제 새알심도 맛을 위해선 포기할 수 없다. 입맛을 다시며 생각하니 국현옥 궁중팥죽은 어쩌면 가요무대와 닮았다. 거짓이 없고, 포장이 없다. 가성비를 따지는 계산도 없으며 무엇보다 변함이 없다. 그래서일까. 죽 한 그릇 먹었을 뿐인데 ‘몇 달 치 식량을 쌓아 놓은것 마냥’ 든든하다. 서늘한 마음은 어쩌지 못해도 시린속을 위로할 정직한 음식이 있어서 다행이지 싶다.

​최지희 전대신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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