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광주사람들

작업의 동굴서 초심으로 회귀... 변화 보여줄 터

[한희원 작가]

작업의 동굴서 초심으로 회귀... 변화 보여줄 터

작성자광주속삭임
작성일시2020/02/03 10:56
조회수221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한 잠깐의 휴식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예순 중반을 넘긴 화가에게 주어진 안식년.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지난해 3월부터 12월까지 머무르고 온 한희원 작가가 광주로 돌아왔다. 10개월여의 시간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여러 가지로 만감이 교차하는듯, 그의 말과 표정에 지난 시간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거절 못 하는 성격 탓에 각종 직책을 많이 맡게 되고, 그림 외에 여러 가지 일에 시달렸어요. 화가라면 응당 침잠의 시간 속에서 작업을 해야 하는데 오래도록 그렇지못 했죠. 작가로서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단 생각을 늘 했어요.”


 오롯이 그림에만 몰두하기 위해 선택한 곳, 바로 조지아 트빌리시다. 조지아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위치한 나라로, 1990년 구 소련이 붕괴되면서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신생국가다. 조지아 정교가 국교로, 국민 전체가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다.


 4년여 전 지인들과 여행으로 조지아에 왔던 그는 꼭 다시 한 번 이곳에 오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고즈넉하고 오래 묵은, 그 자체가 너무 아름다운 도시였던 기억이 남아있어서였다.


 “영어 한 마디 할 줄 모르는 제게 외국에서 혼자 산다는 것은 대단한 도전이었어요. 여행사를 운영하는 친구가 트빌리시에 지사를 내면서 제가 머무를 방 한 칸을 내어줘서 그곳으로 갈 수 있었죠.”


 처음 한 두 달은 동네 일대를 걷고 또 걸으며 여행을 즐겼다.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의 설렘도 잠시, 그곳에서의 매일은 고독의 시간이었다. 원체 말수가 적고 낯을 많이 가리는 탓에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도 어려웠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에서 그림 재료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조지아 인구 450만 중 110만명이 사는 트빌리시에 화방이라고는 두세 곳. 그마저도 광주의 문방구 수준에 불과했다. 그곳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만 갖고 작업을 시작했다.


 “평생을 유화 작업만 해 왔던 저로선 모든 게 다 쉽지 않았어요. 유화 물감을 구하기도, 숙소 화장실에서 기름으로 붓을 계속 빨아 쓸 상황조차 되지 않았죠. 또 작품을 반출하기 위해선 각각의 작품에 승인을 받아야 하는 절차를 거쳐야 하거든요. 그래서 돌돌 말아 여행용 캐리어에 담을 수 있는 종이에 작품을 하기 시작했어요. 처음 그림을 접하는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초심으로 돌아가데생과 드로잉, 수채화와 아크릴 등 하루에 두세 점씩 닥치는 대로 작업했죠.”


 치열하게 작업해야 한다는 강박도 외로움 속으로 빠져드는 데 일조했다. 작업실도 따로 없어서 숙소에서 작업했는데, 행여 물감이 튈세라 방 전체를 검정 천으로 둘러싸고 벽에 비닐을 발라 동굴처럼 만들었다. 이곳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눈 뜨면 또 붓을 드는 쳇바퀴 같은 일상을 지냈다.


 “제 자신과 세상을 돌아보는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가졌어요. 그림과 함께 늘 시를 쓰면서 인간의 내면, 사회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곤 했죠. 그것을 현대적 조형언어로 풀어내는 것이 화가가 하는 일이죠.”


 광주에 돌아온 그는 올해도 바쁘다. 오는 5월 대인동 김냇과에서 귀국전을 갖고, 6월엔 부산에서 사진작가 김홍희씨와 ‘블루’를 주제로 2인전을 갖는다. 7월에는 양림동 한희원미술관 개관 5주년 행사를 갖는다. 트빌리시에서 쓴 시들을 음악으로 만들어 공연도 하고, 시집도 출간할 예정이다. 9월엔 경향신문 주최 ‘명사와 해외 탐방’ 프로그램에 초청돼 조지아 북부 코카서스로 떠난다.


 “조지아에서 머물 수 있었던 건 광주의 예술애호가들 덕분입니다. 작가의 예술적 발전을 위해 이처럼 힘을 모아주는 것이 한국에서 그리 흔한 일은 아닙니다. 예술 정책이 젊은 작가에게만 집중돼 있어, 저같은 베이비부머 첫 세대는 모든 지원에서 제외되는 나이죠. 제가 받은 이기회는 국내 미술계에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트빌리시에서의 기억을 되살려, 그 전보다 더 깊고 좋은 방향으로 작업에 변화를 줄 생각입니다. 그것이 화가로서의 발전이면서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길이기 때문이죠.”

정겨울 광주매일 기자


광주광역시 admin@gwangju.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