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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4년 전 광주에 살았던 이들과 지금의 광주를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나-들'
- - 이들이 기억하고 경험한 광주의 오월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 - 함께 쓰는 역사, 우리의 5월을 이야기합니다.
당신의 5·18이 궁금합니다
동산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
광주여고 3학년이었던 ‘나’,
전도사였던 ‘나’,
평범한 집안의 가장이었던 ‘나’
전대신문 학보사 기자인 ‘나’,
조선대 법학과 재학생인 ‘나’,
문화기획자인 ‘나’,
518기념재단 연구실장인 ‘나’
44년 전 광주에 살았던 이들과
지금의 광주를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나-들’
이들이 기억하고 경험한 광주의 오월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당신의 5·18을 들려주세요
- 1980.05.18
- 2024.05.18
5월 18일은 단순한 날짜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민주화를 이뤄낸 역사적인 메아리이며,
광주 시민의 용기와 희생이 깃든
우리 모두의 소중한 유산입니다.
아픈 시간에 공감하기도 하지만
상처의 깊이에 다가가기 어려운 거리감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픈 상처를 광주의 역사로 고립시키기보단
이 상처를 함께 나누고, 모두가 광주의 오월의 일부가 될 수 있도록
공감의 문을 활짝 열어두는 건 어떨까요.
작은 ‘나-들’의 따뜻한 목소리가 모여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듯
‘우리’의 열린 마음으로 광주의 내일도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박용준 열사는… (1956-1980)
1980년 5월 27일 새벽 광주시 동구 대의동 옛 광주YWCA에서 계엄군의 진압 작전에 맞서 싸우다 산화했다.
고아였던 그는 어린시절 광주영신원과 무등육아원 등 복지시설에서 성장했고 5·18민주화운동 때는 진실을 알리던 시민신문 〈투사회보〉를 제작하는 데 헌신했다.
필체가 좋았던 덕분에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 열사가 써온 내용을 등사지에 필경하는 작업을 도맡았다.
박용준이 한글자 한글자 써낸 투사회보를 통해 당시 광주시민은 광주상황을 알 수 있었으며 그의 필체는 〈투사회보〉에 영원히 남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