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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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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여 년 한 자리
'중앙구내이발관'

오래된 가게 2022.07
글·사진 김현 에세이스트
광주속삭임 7월 제55호 발췌
세월이 흘러도
가위질 소리는 여전

중앙초등학교 구내이발관서 출발해 70여 년 한 자리
학생수 줄어 이젠 어른들 차지됐지만 그 자리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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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구내이발관 외관

가끔은 기록에 소홀한 우리 문화가 아쉬울 때가 많다. 자랑스런 조선왕조실록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지만, 일상의 문화나 작은 역사를 기록하는 데는 관심도 적고 부족한 게 사실이다. 특히 우린 근대 이후 옛 것을 마구 없애가면서도 그 흔적을 남겨 두거나 기록으로 보존하는데 신경쓰지 않아서 많은 자료가 사라져버렸다. 먹고살기도 바쁜데 뭐 그런 거까지 따지느냐고 든다면 할 말 없지만,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신경 쓰는 문화가 있어야 진정한 문화국가가 되는 거 아닌가 생각된다.

담쟁이 넝쿨을 뒤집어 쓴
중앙구내이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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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중앙초등학교 담벼락, 그러니까 한미쇼핑사거리 모서리에 온통 담쟁이 넝쿨을 뒤집어 쓴 채 항상 그 모습 그대로 있는 ‘중앙구내이발관’을 취재하려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문에도 ‘개교할 무렵 생겼다’는 정도이고, 누군가는 70년 되었다고 하고, 누군가는 60년 되었다고 하고 문을 연 시기가 서로 다르다. 그래도 누군가 연원을 좇아 바로 적어보려는 이도 없다.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세월이 흘러도 가위질 소리는 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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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그 자리에, 있는 듯 없는 듯 자리하고 앉아 숱한 시민들의 이발을 해주었던 중앙구내이발관은 대체 언제쯤 생겨났을까? 중앙초등학교는 원래 1907년 일제가 일본인 학생들을 위해 세운 학교였다가 해방되면서 ‘중앙국민학교’로 개교해 오늘에 이른다.

보통 신문기사에는 ‘해방 후 개교와 함께 문을 연’ 이라고 두루뭉술하게 이발관이 생긴 시점을 적고 지나간다. 그렇다면 70년이 훌쩍 넘는다. 또 이 학교 교장선생님은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연혁자료에 보면 1963년도에 문을 열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60년 정도 된다. 그런데 정작 이곳 이발소를 운영하시는 강홍열 이발사(69)는 “70년이 넘었다”고 말씀하신다. 흔한 업종이고 따라서 흔한 이발관 중의 하나여서 구체적 자료 찾기가 어렵지만, 종합해보자면 해방 이후 구내이발소로 시작한 것만은 맞아 보인다. 아마도 개교 이후 많을 때는 학생수가 무려 600여명에 달했다니까 엄청난 이발수요에 문을 열었던 정도로 추론해 본다. 강홍열 이발사는 이곳이 일인들이 다니던 부자학교였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근거가 희박해 일제까지 소환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전쟁 이후 어느 때가 적절한 시점으로 추론된다.

강홍열 이발사가 이곳을 운영한 게 2016년도이니 6년 째이다. 그가 인수하기 이전에 이곳을 운영하던 장 모씨라는 분이 32년간 운영했다고 하니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했으나 그분하고는 연락도 안된다고 한다. 강홍열 이발사도 그 분한테 대강의 내력을 들었을 터이니 이제 이곳의 역사는 70년으로 대강 정의할 수 밖에 없다.

광주 사람들에게
가장 유명한 이발관?

광주 사람들한테 아마 가장 유명한 이발관이 이곳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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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구내이발관 내부

구내 이발관치고는 독특하게 ‘구내’에 있지 않고 학교 담과 연결된 대로변 ‘구외’ 정도에 있고, 그 자리가 워낙 교통량이 많은 곳이라 많은 시민들이 오며가며 봐 왔던 곳이 이곳 중앙구내이발관이다. 초등학교 구내 이발관이어서 단연 초기 손님들로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막아버렸지만 이발관과 학교를 연결하는 문이 있었고 이곳으로 학생과 교직원들이 드나들면서 이발을 했다는 것. 이제 학생이발과는 사실상 단절하고 ‘이름’만 빌려다 쓰는 정도이다. 강 씨는 “이제 학생들은 안 오고 교직원들은 이용하는 분들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곳은 역사가 오랜 이발관이다 보니 옛 추억을 간직하며 찾는 이들이 많다. 취재차 간 날도 염색하거나 이발하는 어르신들이 많았다. 목요일과 금요일 쉬는 날을 빼면 매일 오전부터 문전성시를 이룬단다. 이런 배경에는 강홍열 이발사의 실력이 한 몫하고 있지만 부담없이 찾아올 수 있는 위치나 이름값도 한 몫하고 있다. 한 고객은 “20년째 다닌다. 요즘 이발관은 다 없어지는 데 여기 오면 편하고 실력있는 이발사가 이발해주니 아직도 여기만 다닌다”고 말했다. 가끔은 이 학교를 졸업한 어른들이 찾아와 학생 때 이발하던 추억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단다.

40년 간 멋진 작품을 위해
가위를 고집하는 강홍열 이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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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댓 평 크기의 작은 이발관은 겉에서도 허름하지만 내부도 단출하고 예스럽다. 강 씨가 인수하면서 머리 감을 때 쓰는 물 수조를 없애고 세면대도 새로 바꾸었지만 현대적인 느낌은 아니다. 이곳에서 아주 오래된 느낌의 물건은 딱 하나. 벽에 부착된 거울이다. 전면과 측면에 부착된 대형거울은 꽤 오래된 것으로 보이나 정확하게 어느 정도인지는 주인도 모른다. 하긴 강씨는 자신이 이곳의 몇 대 주인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  2 이미지고객이 그려준 초상화

  •  2 이미지강홍열 이발사

중학교 졸업 후 이발기술을 배워 잠시 외도한 기간을 빼고 40년을 가위를 잡아온 강홍열 씨는 손님들에게 인기가 좋다. 남자들도 거의 대부분 미용실에서 이발을 하는 시대이다보니 실제 이발사도 줄고 이발소도 많지 않은 시대여서 강 씨도 고령층에 든다. 하지만 여전히 거의 모든 이발을 기계가 아닌 가위로 해결할 정도로 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 고객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강 씨는 “기계로 쓱쓱 밀어버리고 싶지만 그러면 멋진 작품이 안 나와 가위를 고집하고 있다”며 “그런 느낌을 아는 젊은이들도 꽤 찾아와 흐뭇하다”고 말했다. 아직도 젊은이들 보며 새로운 유행을 공부하고 스타일을 시험해본다는 강씨가 건재해 중앙구내이발관의 앞날은 당분간 맑아 보인다. 강씨도 “내가 건강이 허락하는 데까지는 하려는데 그 다음엔 누군가는 이어가겠지?”라면 웃는다.

하지만 이발분야에 신규인력 진입이 적고 시설이나 공간의 약점 등을 고려하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도 알수는 없다. 뿌리있는 중앙구내이발관이 앞으로도 명맥을 이어가길 기대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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