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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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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영웅
충장공 김덕령

빛고을 한바꾸-충장사 2022.11
글 · 사진 김경일 시인
광주속삭임 11월 제59호 발췌
가을 무등에서 다시 만난,
젊은 영웅 충장공 김덕령
광주정신을 이야기하기 위한 시작점,
맑은 가을 햇살에 환한 황금빛으로 넘실거리는 충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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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아래 들녘은, 맑은 가을 햇살에 환한 황금빛으로 넘실거려서 더 눈이 부셨다. 모두 제 몫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가을날. 그 길을 따라 무등에 오른다. 하늘은 높푸르고 선들선들한 바람이 어서 오라 손짓한다. 잣고개 너머 제4수원지를 지나 화암마을 쪽으로 굽이돌아 간다. 계절이 바뀌며 봉우리 봉우리마다 초록에서 오색 빛깔의 꼬까옷으로 갈아입고 서로 뽐내고 있다. 내쳐 운암서원과 충민사를 옆에 두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배재 산길을 올라간다. 산 정상으로 들어서는 원효사 쪽으로 가는 길과 광주댐으로 가는 금곡마을 쪽으로 길이 갈라지는 곳에 충장사가 자리하고 있다.

광주정신과 날개 꺾인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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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어머니 산 무등은 광주의 진산이다. 시민들이 꿋꿋한 자존감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든든한 뒷배에는 어김없이 무등이 있다. 충장사에 들어서자 반갑게 맞아주는 이가 있었다. 단아한 붉은색 한복을 입은 문화관광해설사 천금희 님은 손에 잡힐 듯 찬찬하게 조곤조곤 안내를 해준다.

“광주정신을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이곳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나라가 어려움에 당해 호명할 때마다 꺼지지 않는 그 의기로 이 땅에 응답하고 있는 산.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과 서석대, 입석대, 광석대 주상절리 군으로 의연하게 서 있다.

그래서일까. 이 산자락에는 골골마다 찬연한 삶을 살다 간 옛사람들의 결기가 넘친다. 눌제 박상, 석천 임억령, 소쇄 양산보와 면앙정 송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백호 임제, 송강 정철 등 그 흔적들이 무등산처럼 세월이 지나도 그 빛을 잃지 않는다.

“충장공 김덕령은 광주의 정의로움과 의기(義氣)를 대변하는 큰 인물입니다.”

충장공처럼 굵고 짧은 생을 살다 갔어도 시민들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드물다. 그가 죽은 지 420여 년이 지났지만 그를 묘사한 이야기와 설화로 김덕령 장군의 충정과 의기는 고스란히 민초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일신의 영달만을 구하기보다 나라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흔연하게 버릴 줄 알았던 사람 김덕령은 날개를 단 아기 장수였단다. 이를 면면히 계승하여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모르쇠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 오월 광주를 세계 속에 빛낸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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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에서는 효자, 나라에서는 충신

김덕령 장군은 1567년 광주시 충효동에서 태어났다.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송강 정철과 함께 수학하였던 충장공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김덕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제봉 고경명의 지휘 아래 전라도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떨쳐나섰다. 그 도중에 돌아가서 병든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귀향하였다. 형 김덕보는 의병장 조헌이 이끈 금산싸움에서 전사하고 만다. 1593년 어머니 상중임에도 담양부사와 장성현감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세력을 인근에 기세를 크게 떨치자,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워낙 작은 체구임에도 민첩하고 용력이 뛰어나 군사를 다룰 땐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 1594년 세자의 분조(分朝)로 세워진 무군사(撫軍司)에 지략과 용맹이 알려져 세자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칭호를 받았다. 현재 충장사에도 이를 딴 내삼문이 익호문(翼虎門)이다. 그 뒤 김덕령 장군은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영남 서부 지역의 방어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1596년 이몽학의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로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끝내 옥사하고 만다.

억울한 죽음 뒤, 미완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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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은 1661년(현종 2년)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었다. 1788년(정조 12년)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고 국가에 공훈이 있는 인물의 신주(神主)를 영구히 사당에 제사 지내게 하던 특전인 부조특명(不祧特命)이 내려졌다. 1678년(숙종 4년) 광주의 벽진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이듬해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 이때 내린 시호가 충장(忠壯)이다.

1975년에 건립된 이곳 충장사는 장군의 묘와 가족묘가 조성돼 있다. 광주의 중심가 충장로는 김덕령 장군의 시호에서 유래한 도로명이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불붙는다./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이 몸에 연기 없는 불은 끌 물 없어 하노라. 충장공 김덕령 장군이 죽기 전에 지었다는 ‘춘산곡(春山曲)’ 은 지금도 시민들을 울리는 시(詩)다. 충장사에는 김덕령의 영정과 교지가 봉안되어있는 사우 충장사와 동재와 서재, 은륜비각과 해설비, 유물관, 충용문, 익호문 등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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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관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11호로 지정된 '김덕령 장군' 의복과 장군의 묘에서 출토된 관곽, 친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짧아진 가을볕을 재촉해 충장사를 둘러보면서 혹여나 타 지역에서 온 이들에게 광주정신의 근간이 홀대로 비쳐지지 않도록 조금 더 다양한 시민들의 관심과 행정의 지원이 이루어지면 어떨까 싶다. 인근의 무등산분청사기 전시실과 김덕령 장군이 태어난 충효마을에 생가터와 그 앞 무리를 이룬 충효동 왕버들나무 쪽에 세워진 김덕령 장군 정려비도 찾아보면 좋겠다. 큰 형 덕홍이 금산전투에서 순절하고, 작은 형 충장공 김덕령이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옥사하자, 세상을 등진 막내 김덕보가 지은 풍암정사의 가을 풍경도 고졸하다. 장군이 어릴 때 뛰어놀고 형 덕홍과 함께 글을 배웠던 곳인 환벽당과 1890(고종 27년)에 권필의 꿈에 나타난 김덕령 장군과 시를 주고받았다는 이야기가 스며있는 취가정도 꼭 들려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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